하룻밤 놀이처럼 시작된 모의재판 공방!
섬유 판매 회사의 지배인으로 승진한 트랍스는 출장중 자동차 사고로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은퇴한 전직 판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집주인은 그날 밤에 열리게 될 친구들과의 만참 겸 게임에 트랍스를 초대하고, 차마 집주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트랍스는 현실의 법률을 초월한 기묘한 모의재판에 피고로 참여하게 되지요. 각자 은퇴한 집주인의 친구들이 검사와 변호사, 사형집행인과 진행자를 맡아 호화로운 요리와 고급 와인을 곁들인 즐거워야 했을 게임은 점차 미묘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자아내기 시작하는데...
지극히 현실적이기에 그래서 더욱 부조리한 삶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블랙코미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만했던 영업사원으로서 법을 어기는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하던 트랍스는 검사의 집요한 추궁과 변호사의 이해할 수 없는 변론에 말려들어, 얼마전 심장마비로 사망한 직장 상사 기갑스의 일을 모의재판에서 털어놓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질투하며 승진을 집요하게 방해하던 직장 상사와의 불륜을 저지른 다음, 직장 내 라이벌에게 불륜 사실을 흘려 기갑스의 귀에 모든 사실이 전달되도록 한 것이었지요. 원래 허약했던 기갑스는 평소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기갑스의 불행은 트랍스의 승진이라는 행운으로 바뀌었습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인가, 악의적 고의에 의해 죽음에 이른 것인가
작고 평범했던 일상의 우연한 사고가 모의재판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면서, 트랍스는 양심과 정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은퇴한 노인들의 고상한 취미였던 게임은 과도한 호기심과 무절제한 장난기가 더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연극을 보면서 타인에 대한 선을 넘는 관심과 장난이 얼마나 커다란 재앙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교활한 노인들의 덫에 걸려 광기어린 파티에 내던져진 트랍스의 무지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점,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물음
길게 늘어선 테이블에 실제로 산해진미가 서빙되는 만찬과 가사도우미 시모네의 피아노 연주가 만들어내는 작품 속 미묘한 긴장과 갈등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연출이 돋보였습니다. 가운데 무대를 둘러싼 객석 배치는 마치 재판의 배심원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90분간 재판이 펼쳐져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우스꽝스런 광대같아 보이는 인물들이 각자 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점과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며 잔잔한 여운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독일어로 재판과 향연은 같은 단어라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가을 주말, 멋진 연극에 초대해 주신 씨네21에 감사드립니다!